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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나이 사망이유 사망원인 부인 자녀 출생 프로필 모든 정부

by barma 2022. 11. 30.

‘상하이방’ 장쩌민 누구? 中 개혁개방 꽃피워…톈안먼 유혈진압도
- 2022. 11. 30



피아노와 얼후(二胡ㆍ줄이 두개인 전통 현악기)를 연주하고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영어로 줄줄 외던 부잣집 도련님. 톈안먼(天安門) 앞 대학생들을 강경 유혈 진압하는데 묵인하고 개혁·개방의 꽃을 피웠으며 권력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노회한 정치인. 30일 96세를 일기로 사망한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걸었던 삶의 궤적이랍니다.


● 클래식에 심취한 양저우의 도련님

장 전 주석은 1926년 8월 17일 양쯔(楊子) 강 하류의 유서 깊은 도시 양저우(楊州)에서 대저택에서 부유한 지식인의 셋째(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조부 장스시(江石溪)는 학자, 시인, 의사, 음악가이자 상인으로 성공해 큰 부를 이뤘다. 친부 장스쥔(江世俊)은 전기 기술자였지만 많은 글을 썼다. 훗날 장 전 주석이 공학도이면서 인문학에 남다른 조예를 보였던 것도 이 같은 배경 때문이다. 친모 우웨칭(吳月卿)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답니다.




장 전 주석의 가풍은 사회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삼촌이 1920~1930년대에 혁명 운동을 하다 요절하자 숙모의 양자로 들어가기 했지만 그의 유년기는 서양의 자본주의 문화에 심취했던 때였다.


그는 엘리트 인생을 걸었다. 양저우의 명문 둥관(東關)소학교(현 충화관·瓊花觀소학교)에서 서양 고전음악에 대한 평생의 애정을 갖게 된다. 나중에 “중국인들도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 때의 경험에 기인한다. 지원자의 10%만 합격한다는 양저우중학교에서는 과학과 동서양 문학에 빠져 들었답니다.

입학한 해에 중일전쟁(1937년 7월)이 발발해 수업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게 된 것 같지도 않다. 장 전 주석은 “그때 일어를 충분히 배우지 못해 아쉽다”고 술회했다. 다만 그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 당시에 서양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나중에 “그때 배운 영어가 지금 대학생들이 배우는 영어보다 낫다”며 자신의 영어 실력에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장 전 주석은 1943년 난징중앙(南京中央)대 산업기술 및 전기기계 학부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2년 뒤 자오퉁(交通)대의 충칭(重慶)과 상하이(上海) 교정과 합쳐졌다. 장 전 주석이 상하이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 건 대학 통폐합으로 이 곳에서 공부하게 된 때문이었답니다.

● ‘미스터 호랑이 연고’에서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대학을 졸업한 1947년 그는 국민당 치하의 상하이에서 미국 회사의 300마력짜리 디젤엔진을 관리하는 직장을 잡게 된다. 미국인과 국민당 상사 밑에서 미래의 공산당 총서기가 일한 것. 1949년 공산당이 상하이를 접수하자 이 회사의 유일한 공산당원이던 그는 회사의 당 지부장이 된다. 이 때 고교시절 애인이던 왕예핑(王冶坪)과 결혼했습니다.


이듬해 상하이의 영국기업 ‘중국비누공장’으로 배치된 그는 이 곳에서 평생의 은인 왕다오한(王道涵) 당시 동중국산업부 부장을 만난다. 왕 부장은 이후 40년 간 장 전 주석을 후원했다. 산업 기술을 갖고 있는 ‘붉은 전문가’로 인정받은 그는 이후 베이징(北京)으로 차출돼 ‘제1기계제작부’에 배속됐다가 1955년 소련 모스크바의 ‘스탈린 자동차’에서 2년간 연수를 받는 등 국제 감각을 익히게 된다.

1966년 중국 대륙을 휘몰아친 문화혁명은 ‘정치인 장쩌민’을 담금질한 시기였다. 우파 숙청이 시작되자 그는 살아남기 위해 소극적이나마 이에 동참했다. 홍위병의 폭력에 삼촌 한 명이 희생됐지만 그가 1년 정직에 그친 것은 정치적으로 영리해진데다 꼼꼼하게 주변과 연줄을 엮어간 덕분이었다. 문화혁명이 끝나자 그는 ‘57간부학교’ 외교국에 자리를 얻었다. 그의 표현대로 대학 졸업 후부터 기술자로서 살아온 ‘밑바닥 23년’이 끝난 시점이었다. 이후 외교국 부국장과 국장이 돼 본격적인 관료로서의 길을 걸었답니다.

그는 1980년 국가대외투자관리위원회와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이 되면서 차관급으로 올라갔다. 이어 전자공업부 부부장과 부장을 지내는 등 승진 가도를 달렸다. 본격적인 개혁·개방이 시작됐을 때 기술 관료이면서 국제 감각을 갖춘 이는 많지 않았다. 그는 기계, 전자, 전력은 물론 무역까지 다양하게 경력을 쌓았다. 장 전 주석은 당시의 자신이 ‘미스터 호랑이 연고(萬金油)’였다고 회고했다. 특별히 잘 하는 것은 없지만 웬만한 사업에는 모두 관여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이 장 전 주석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던 것처럼 1989년 톈안먼 사태 역시 그랬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자신의 후계자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을 실각시킨 뒤 3세대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발탁 조건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경제적으로는 개혁·개방을 계속 밀고 갈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때 상하이 서기로 있던 장 전 주석이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왔다. 장 전 주석은 그해 4월 후야오방 사망 당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상하이의 진보 주간지 ‘세계경제대보’의 편집인을 해임하며 강경파로 이름을 올렸다. 또 천윈(陳雲) 펑전(彭眞) 등 보수 혁명원로들과 폭넓게 교제했지만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다. 1989년 6월 24일 장 전 주석은 중국 공산당 제13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3중전회)에서 다른 상무위원 5명과 함께 당 총서기 자격으로 연단에 오름으로써 그의 치세가 시작됨을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동시에 덩샤오핑을 대리해 무대에 잠시 나와 있는 임시 지도자라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장 전 주석은 당시를 회상하며 “마치 절벽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답니다.

● 임시직 총서기에서 권력의 핵으로

장 전 주석의 권력 승계는 더디지만 착실히 이뤄졌다. 덩샤오핑은 1989년 9월 군대 경험이 없는 장 전 주석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넘겨줬다. 군권은 무장혁명으로 건국한 중국 권력의 정수다. 장 전 주석은 자신의 결점을 메우기 위해 2년 간 100개가량의 사단을 방문했다. 또 국방비를 대폭 늘려 군부의 충성을 유도했다. 중국의 대폭적인 군비 증가는 이처럼 정치권력 내부의 문제와도 연결돼 있다. 장 전 주석은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에게 주석직을 넘겨주면서도 군사위 주석직은 이후 2년 간 더 쥐고 있을 정도로 군에 대한 애착이 컸답니다.

장 전 주석은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목도하며 사상적 통제도 강화했다. 그는 1989년 11월 “언론은 부르주아 해방의 발언대가 되선 안 된다”며 언론사 통폐합을 주도했다.

본격적인 권력 장악은 1992년 리펑(李鵬) 총리 등 보수파와 덩샤오핑 간의 힘겨루기를 기점으로 시작됐다. 덩샤오핑은 전면적인 개혁·개방에 반대하는 보수파에 맞서 위해 남부 연안을 순례하며 변화를 촉구하는 남순강화로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당시 장 전 주석도 보수파의 공격으로 궁지에 처해있던 시기였다.

장 전 주석은 이어 여전히 군권을 쥐고 있던 군부 강경파 양상쿤(楊尙昆) 양바이빙(楊白氷) 형제를 숙청한 뒤 대대적인 군 인사를 단행했다. 또 1995년 베이징을 장악하며 자신에게 반기를 들던 천시퉁陳希同) 당시 베이징 당서기를 부패 혐의로 사법처리함으로써 지방권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실질적인 힘을 과시했습니다.

장 전 주석의 집권은 사상 측면에서도 치밀하게 완성돼 갔다. 그는 상하이 푸단(復旦)대의 최연소 신동 교수 왕후닝(王호寧)을 발탁해 아시아 국가의 개발독재 이념을 중국 사회에 주입했다. 애국심 고취, 중앙권력 강화, 당의 재건, 부패 추방 등이 당시에 나온 사상 기조였다. 왕후닝은 장 전 주석에 이어 후진타오, 시진핑(習近平)에 이르기까지 3대째 중국 지도부의 책사로 있다.




장 전 주석이 상하이 서기로 있을 때의 별명은 ‘풍향계’였다. 정치적 시류에 민감하게 반응한 때문이다. 그는 1986년 대학생 시위 때는 후야오방에게서 등을 돌렸고, 1989년 인플레이션 논란 때는 자오쯔양과 결별했다. 하지만 그는 영민한 정치 감각과 자신을 중심으로 한 권력 구축을 통해 상하이방(상하이 출신 관료 모임)을 이끌며 퇴임 이후 2대 정권에 걸쳐 자신의 성을 지키며 현실 정치에 관여해왔답니다.


- 중화인민공화국 제5대 주석
장쩌민

출생 나이 생일
1926년 8월 17일

고향 출생지
중화민국 장쑤성 양저우시
사망
2022년 11월 30일 (향년 96세)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재임기간
제3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1989년 6월 24일 ~ 2002년 11월 15일
제4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1989년 11월 9일 ~ 2004년 9월 19일
제5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1993년 3월 27일 ~ 2003년 3월 15일

부모
아버지: 강세준(江世俊), 계부: 강상청(江上青)
어머니: 오월경(吴月卿), 계모: 왕자란(王者籣)

형제자매 가족관계
동생 장쩌쥔, 장쩌콴
배우자 부인 아내 와이프
왕예핑
자녀
아들 장몐헝, 장몐캉

학력
양주중학(江苏省扬州中学) (졸업)
중앙대학 (전학)
상하이교통대학 (전기기계학과 / 학사)
종교
무종교 (무신론)

신장
172cm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전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주석. 중화민국 장쑤성 양저우 출신. 1세대 마오쩌둥-저우언라이, 2세대 덩샤오핑 등에 이은 중국의 3세대 지도자로 분류된답니다.

퇴임 이후 후진타오 시대까지 중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시진핑 독재 체제가 된 2018년 이후로는 전직 국가원수 예우만 받고 있다. 그러나 장쩌민, 후진타오 주석 시절과 2010년대 중후반 이후의 중국의 스탠스나 상황이 워낙 달라진데다, 후임이 된 시진핑이 주석 임기제를 깨고 종신 집권제를 꾀하는 등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후임인 후진타오와 함께 다시금 재평가되고 있답니다.

2022년 11월 30일 백혈병 투병 도중에 향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퇴임이후의 행적은?

2011년 7월 6일, 사망설이 나돌았었다. 하지만 다음 날, 바로 오보였다고 공식 발표했고, 이 방송을 낸 aTV 사장은 사임했다. 병원에 입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퇴원했다고 한다.

2012년 들어서는 공식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다가, 2012년 11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진타오 주석 바로 옆 자리를 배정받아 차기 지도자 시진핑보다도 높은 의전서열로 그의 권력이 아직 막강함을 보여주었으며, 실제 전국대표대회 결과 구성된 신임 중국 지도부도 그가 이끄는 상하이방과 협력 관계인 태자당 소속 시진핑이 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후진타오로부터 물려받았으며,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직도 대부분 상하이방과 태자당 소속 인물들이 물려받았다. 도올 김용옥의 견해에 의하면, 덩샤오핑이 장쩌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는 했지만, 장쩌민이 워낙 권력 의지가 강하고, 주위에 패거리를 잘 만드는 경향을 우려했다고 한답니다.

그리하여 무언가 제어책이 없으면 종신 집권을 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자기 생전에 이미 후진타오를 장쩌민의 후임으로 못박아 놓았다고 한다. 사실 후진타오는 재임 내내 장쩌민 또는 장쩌민 일파와 권력 다툼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후진타오의 공청단파와 장쩌민의 상하이방이 치고받는 동안 태자당에서 말석 시진핑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시진핑은 사실 태자당 내에서도 보시라이에 밀렸으나, 보시라이가 권력을 남용하다가 몰락하면서 태자당에서 선두에 나서고 결과적으로 집권까지 이르게 된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장쩌민의 후계자이자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의 정치생명이 끝나기 전까지 이야기다. 장쩌민에게 군사위 주석을 물려받은 후에도 파워게임에서 밀리던 후진타오지만 천량위를 부정부패 문제로 정치생명을 끊은 것을 기점으로 여러 상하이방 인물들을 몰아내며 최고지도자다운 파워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후진타오는 시진핑에게 군사위 주석직을 바로 넘겨주는 대가로 장쩌민과 동시에 정치에서 물러나는 물귀신 작전을 펼쳤답니다.

이 거래가 성사하자, 시진핑은 5세대 1기 상무위원들 7명중 4명이나 상하이방이었지만 이들을 집요하고 철저히 몰아냈다. 특히 상하이방의 중추이자 중국에서도 손에 꼽는 막강한 권력자 저우융캉 정법위 서기를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보내 텃밭에서 채소나 기르는 신세로 만들며 시진핑이 장쩌민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답니다.

한마디로 시진핑 시대에서 장쩌민은 실질적 영향력이 없다고 봐도 좋다. 게다가 상하이방은 본질적으로 1970-80년대 장쩌민과 상하이 지역에서 일한 사람들이 주축이며, 장쩌민이 주석으로 등극한 이후에는 신진 세력들이 충원되지 않으면서 시간이 갈수록 노장화되어 은퇴하자 당내 세력이 약화되었다. 상하이방의 가장 젊은 세대가 시진핑과 비슷한 1950년대생이다. 여기에 기업체 출신이 많아서 부패 단속에 걸리는 자들이 많았고, 시진핑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반부패운동을 벌여 상하이방의 핵심 인물들을 상당후 축출했다. 젊은 세대가 없는 계파 특성상 시진핑 이후에는 소멸되는 것이 시간문제일 뿐이랍니다.


2019년 10월 1일 70주년 국경절(건국 기념일) 기념 열병식에도 보좌관의 부축을 받으며 시진핑, 후진타오와 함께 천안문 망루의 주석단에 나왔다. 후진타오가 집권시기보다 나이가 많이 들고 백발이 되어서 조금 덜 드러났지만, 90대의 나이 때문인지 혼자 걸을 수 없을 만큼 심히 노쇠해진 모습을 보였다. 열병식 직후 실시된 대규모 민간 퍼레이드에서 자신의 대형 초상화가 지나가고 광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자신의 지도자 시절 모습이 비춰질 때도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답니다.

그래도 염색의 힘을 빌려서 그런지 90이 훌쩍 넘은 사람치고는 아주 동안인데, 염색을 안한 후진타오보다 젊어 보인다는 평도 있을 정도다. 2021년 7월 1일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100주년 기념 행사에 후진타오 전 주석은 참석했지만, 장쩌민은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답니다.

이후에 2022년 96세 생일잔치를 맞아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홍콩 명보에 올라왔는데, 확실히 노쇠함과 연로함이 드러난답니다.

다만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 불참하게 되면서 자신의 후임인 후진타오의 불명예 퇴장은 보지 않게 되었다. 여담으로 자신의 계파인 상하이방 및 후임자 계파인 공청단 소속의 국무위원은 7인방에서 배제되면서 시진핑 주석 중심의 시자쥔 독주가 확실해져 정치 권력의 완전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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